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이어지거나
새로 수정하게 될 글이 될 것이기에
번호를 붙여본다.
살던대로 사는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온실 속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문득문득 이질감을 느끼던 때도 있었지만
굳이 그 문제에 천착하지 않아도 될만큼
나의 삶은 안정감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체제 속에서 충분히 괜찮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대개의 시간 동안 그것이 나를 기껍게 만들었다.
여느 소설에서 사건의 발단의 역할을 하는
심대한 위기나 삶이 내던지는 순간도
내게는 찾아온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정도로 모험적이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한번에 내던지는 선택을 할만큼 담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위선에 내 정신이 너무 많이 녹아들도록 허락하지 않음으로서
소극적인 반항으로 삶을 채워나갔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행동을 바꾸고
새로운 가면을 쓰는데
능숙하고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의 가벼움을
조롱하고 싶었지만
나또한 그런 가벼운 존재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삶을 이어갈수록
계속해서 자신을 포장하고자 하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게 나를 설명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은 옅어졌다.
(다행인 것은 나는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 찾아오는 명료함이 있는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좌절 속에서 문득 깨어난 보상심리와는 다른
허영과 불안 양 쪽 어디에도 삶이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고 나서야
찾아오는 관점과 믿음이 있다.
어찌되었든
지금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난세 아닌 시절이 없었던 역사 속에서
바로 이 시대가 난세임을
비로소 내가 자각하고 있음을 확정하기 위해서이다.
십수년 후 돌이켜보았을 때
이 때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앞선 여러 글들에서
세계의 구조는 완전하기 보다는 결합된 모순의 연속이며,
복잡계 안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율배반적인 서로 다른 진리가 모두 역할을 함에 대해서 강조한 바 있다.
어떤 하나의 이념을 택할만큼 단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딘가 이질적인 이 느낌을 무시한 채 초연하게 지낼 수 없는 이들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가
방향잡이가 될 지 모르겠다 잠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종래에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삶에 그저 충실한 이들에게는
이 모든 이야기는 그냥 흘러가는 강이요
지나가는 바람일 뿐일 것이다.
듣고자 하면 들리지만 꼭 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결국 이는 나를 위한, 나만의 의식행위이고 순수한 자기 만족이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구조 속에 날 때부터 놓였있었고,
이 구조는 신의 규칙과도 같이 여겨지는
엄밀한 수학과 물리학에 기반한 우주 탄생에 기반한 구조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어떤 행위는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오늘의 나를 살아가는 시각에서 볼 때
중요하다 생각되는 몇 가지 구조적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면
한없이 가벼운 존재에 초연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매어둘 구심점 역할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증가하는 엔트로피 안에 노출되어 있다.
작은 나의 삶을 이어나가는 행위는
이 엔트로피를 역행하고자 시도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때문에 삶의 모든 행위는 크든 작든 파문을 일으키고
그 속에서 나름의 치열한 심상을 우리는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에 노출되어 있다.
최초에 아무런 잉여가 없던 시절의 비루하고 연약한
자연에 대한 그리고 만인의 대한 투쟁 상태에 놓여진 인간에서
효율과 안정, 성취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인플레이션 구조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였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엔트로피 안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역행자의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위대한 역사들은 실상 이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우리의 삶은 종래에 이 우주의 모든 것과 하나로 귀결되는 순행으로
순환되는 흐름 안에 놓여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의식'하는 현생의 삶은
탄생의 순간부터 역행의 모양새이며
현생에서 온갖 세속을 탐하고 고뇌하다가
가는 역설적인 구조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도 더 이전부터
이러한 구조는 여러 형태를 거치면서 변화해왔고
패치워크 형태로 얼기설기 억지로 짜맞춘 듯한 이 구조는
그런대로 계속해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설계가 있을 것이라 믿는 순진한 이들은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 현자인냥 살아가고,
이 구조의 모순성에 집착하는 이들은
분노하고 질투하고 끝내 스스로를 속이며 그 누구보다 이기적인 욕망을 쫓는 삶을 선택하고,
대다수 체념하고 순응하는 이들은
이러한 구조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으로 발버둥치지만
아주 극소수의 운좋은 이들을 제외하면 부평초처럼 대중의 선택과 방향을 따르면서
이 구조를 이끌고 있는 이들의 의도에 따라 휘둘리고 이용당하게 된다.
그들이 좋다 말하는 것들
그들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에
뿌리깊게 세뇌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것이 마치 자기의 것인냥
착각 속에 오랜 세월 떠돌다가 가는 것이지만
큰 그림에서 볼 때 이 판을 움직이고 설계하는 이들 또한
그들의 조작에 따라 움직이는 대중에 다시 영향받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이 모든 이야기들
쉽게 접할 수 있는 언론이 비춰주는 방향,
여러 명사들이 던져주는 지혜로운 통찰의 탈을 쓴 의도가 감추어진 이야기들,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계획적으로 주입되는 획일적인 지식과 목표들,
법과 의무라는 형태로 강요된 국가와 사회의 틀과 해석 그리고 통제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욕망을 디자인하고 세뇌하여
사회를 움직이게끔 끊임없이 추동한다.
그토록 열심히 모았던 화폐는 인플레이션에 녹아버리고
내가 소유했다 믿었던 모든 것들은
그들의 결정에 의해 단 한순간에 깨어져버린 약속 마냥
나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의 삶에 무기력함만을 남겨놓을 수 있다.
자연에 의해 한 해의 모든 농사가 날아간 농부의 지난 수천년의 경험,
문명 이전에 지구의 순환에 의해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생존이 위태로웠던 인류의 경험,
우주의 순환에 의해 운석 충돌 한방에 모든 것이 리셋되는 수준의 변화에 절멸에 가까웠던 이 지구 생명의 경험
그러한 경험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서 말했듯이 우리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세기에 걸쳐서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 위한 욕망을 충실히 따라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이 구조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고
이 구조는 우리의 욕망이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당신이 좀 더 세속적인 생각에 능숙하다면
우리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단 하나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인간은 이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이 구조를 선택한 모순적인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고
이것에 삶을 베팅해 나가는 것이 확률적으로 옳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다
욕심과 생각, 집착, 불안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삶을 둘러보니
용기와 선택, 믿음이란 칼이 내게 주어져 있었다.
Bit Beat B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