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를 한다.
우리가 그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에 공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인간적인 교감이 어느정도 가능할 것이다.
대개의 떠도는 내용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단편적이기에
깊이 있는 이해는 몰입과 자기 내면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그동안의 이해가 검증된다.
충분히 이해가 된 일이지만
생각보다 굳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신에게
필요에 의한 통제와 제약이 필요하다 느끼는 순간도 더러 있다.
즉, 어떤 것을 추구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삶의 매순간 나의 한 부분들을 발견하곤 한다.
예전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명확한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뿜어내는 색깔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방식을 익히길 원했기에
몰입하고자 했다.
대체로 그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그 사람의 경험을 내가 온전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뿐더러
실제로 우리의 자의식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자의식은 순간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고 흘러간다.
계속해서 변해가는 자의식이 아니라면 사실 나에 대해서 온전히 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이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았건 간에
아주 클리쉐같은 이야기지만 이는 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개의 일이 그러하든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보고 싶은 만큼만 무엇이든 드러내는 법이다.
우리의 삶은 매우 중첩되어 있고, 그리고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매순간을 통시적으로 때때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깊이 통찰할 맛이 없다면 크게 기꺼울 일도 없다.
크게 기꺼워 할 일이 아니라면 대체로 무의미해져 버린다.
만약 매순간 온전히 그 깊이를 느끼고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자의식은 비로소 여러겹의 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밀도만큼 삶이 두터워지고,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 교감할 수 있다면
정말로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누구도 그 깊이를 열어헤치고 교감할만큼
정교하게 그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기에
비로소 자유롭고 온전하다.